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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joy/어디

창경궁 / 종로

by Catpilot 2025.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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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의 시간 속으로"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던 어느 봄날 오후,

아이와 나는 도시의 바쁜 리듬을 잠시 벗어나 창경궁으로 향했다.

붉은 벽돌 대신 고즈넉한 돌담길이 우리를 반기고, 거리의 소음은 담장 너머로 스르륵 사라졌다.

문득, 마치 시간을 거슬러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궁궐의 첫인상을 남긴 건 바로 <명정문>이었다.

창경궁의 정전인 인정전에 이르기전, 가장 먼저 만나는 이 문은 어딘가 조용하고 정돈된 분위기였다.

크고 화려한 경복궁과는 조금 달랐다.

 

 

우리는 곧장 궁의 중심으로 향했고, 가장 먼저 만난 건 <명정전>이었다.

고운 기와를 이고 선 나무 문이 햇빛을 받아 따뜻한 색으로 빛났다.

 

 

"이 문을 지나면 왕이 나라 일이 하던 곳이 나와."

나는 아이에게 속삭이듯 말하며 문을 함께 넘었다.

문을 지나는 순간, 시간도 문턱을 넘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곧이어 눈앞에 <명정전>이 펼쳐졌다.

창경궁의 정전이자, 임금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던 중심 전각이다.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정전 앞에 서자, 아이는 고개를 들어 지붕 끝을 오래 바라보았다.

 

 

 

경춘전은 조선시대 왕의 어머니인 대비가 거처했던 공간으로, '봄의 경치'라는 이름처럼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유난히 아늑할 듯싶었다.

이곳은 순조의 어머니, 정순왕후가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정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품은 양화당은 본래 궁중 의례나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이었다.

창경궁 내에서도 조용하고 은은한 분위기를 지닌 곳이다.

다른 전각에 비해 작고 아담하지만, 마당을 중심으로 펼쳐진 구조는 오히려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양화당에서 성종태실로 향하는 길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돌계단에 오르자 멋진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궁궐의 모습은 더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자주 찾는 정전 쪽과 달리, 이쪽 길은 아늑하고 숲이 울창하게 들어차 있었다.

작은 오솔길처럼 이어지는 흙길, 좌우로 늘어진 소나무와 느티나무들, 그리고 그 사이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까지.

바로 이 길이 성종의 태실이 보존된 자리로 이어지는 길이다.

태실이란 왕의 태를 묻은 장소로, 성종의 태실은 원래 경기도 파주에 있었다가 일제강점기 때 창경궁으로 옮겨진 것이다.

 

 

전각들을 돌아본 뒤,

우리는 궁궐 깊은 곳에 자리한 <부용지>로 발길을 옮겼다.

붉은 단청 대신 나무 그림자와 바람이 머무는 이곳은,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연못 위로 놓인 다리, 잔잔히 흔들리는 물결, 그리고 그 위에 고요히 비친 나무들의 그림자.

 

돌아 나오는 길, 다시 명정문을 지나며 아이가 말했다.

"여긴 좀 조용한 궁이네. 근데 좋아."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창경궁은 조용했고, 겸손했고,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창경궁.

그 안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오래도록 기억될 하루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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