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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joy/무엇

달팽이 키우기

퇴근 후 집에 들어서자 식탁 위에 놓인 투명한 일회용 컵이 눈에 들어왔다.

"아...!"
나도 모를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살아있는 뭔가 가져왔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거 뭐야?"
아내에게 물어보는 동시에 컵 안을 보니 흙 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 대신 잔뜩 흥분한 딸아이가 대답했다.
"아빠, 그거 달팽이야!"

또, 숙제가 생긴 셈이다.
같이 살아가야 하는 생명에 대한 이해와 공부가 필요하니까.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어린이집 친구의 어머니로부터 선물이라며 쇼핑백에서 주섬주섬 물건을 꺼냈다.
두꺼운 비닐 포장이 된 코코피트와 길이 30cm 정도 되는 투명 플라스틱 박스였다.

"친절하게도 박스 뚜껑에 구멍을 뚫어 놓으셨네."
어서 집을 만들자며 재촉하는 눈빛을 한 딸아이에게 웃으며 그 자리에 앉았다.

의외로 달팽이 집 만들기는 간단했다.
코코피트를 달팽이 키의 두배 정도 깔아 두면 달팽이 집 짓기가 끝이다.

"달팽이는 물을 좋아해."
습도가 높게 살아가는 기본적인 달팽이 생활환경을 쉽게 취향으로 바꿔 말해주었다.

"그럼, 내가 물을 줄 거야!"
물을 담은 스프레이를 뺏듯 휙 낚아채 가져갔다.
칙칙 뿌리는 물은 바닥에 반 박스 안에 반으로 흥건히 젖었다.

일회용 컵에서 달팽이를 꺼내 새 집으로 옮겼다.
꽤 큰집이 생겼음에도 잔뜩 몸을 움츠려 숨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배고플 테니 어서 식사부터하라고 살포시 상추를 이불 삼아 달팽이에게 덮어 주었다.

뚜껑을 덮고 아직 낯설어하는 달팽이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아이는 아직 흥미가 남았는지 얼굴을 박스에 닿을 듯 대고선 한참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아이가 무슨 큰일이 났다는 듯이 나를 불러댔다.
"아빠, 아빠, 봐봐."

아이의 부름에 달팽이 집을 들여다보니, 상추에 작고 귀여운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렇게 첫 식사를 하고 우리와 동거를 시작했다.


상추를 먹고 싼 진녹색 똥이 웅덩이 안에 모여있다.
그 응가를 잘 치워줘야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니 이제는 달팽이보다 응가를 먼저 찾게 된다.


더듬이를 쭉 세우고 상추를 향해 나풀거리며 엉금엉금 기어가는 모습이 귀엽기만 하다.

한 번은 아이가 자기 전에 달팽이를 구경 하선 뚜껑을 열어둔 채 잠이 든 적이 있었다.
아침에 확인해보니 달팽이는 이미 가출하고 사라진 후였다.
이곳저곳을 찾아 가구 틈새에 등에 맨 껍질이 끼여있는 달팽이를 발견하고선 안도의 숨을 쉬었다.
작은 생명이 메말라 죽을까 딸아이와 집안을 뒤져가며 한참을 찾던 그 기억도 좋은 추억이 되었길 바라본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달팽이를 키운다는 말을 던지자마자 엄청난 조언이 쏟아져 나왔다.

"엄청 커진대요."
"새끼를 엄청 낳는대요."
"야생에 풀어주면 생태계를 파괴한대요."

직장동료들이 토해내는 부정적인 말들에 속에서
"직접 키워봤어요?"

상추를 들고 어금 어금 먹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초록색 음식을 먹으면 초록 똥을 주황색 음식을 먹으면 주황 똥을 싸는 솔직한 모습을 그들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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